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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 리뷰

'택시운전사'들과 '위르겐 힌츠페터', 5.18 민주화운동을 세상밖으로

by 빨강머리 앤 2017. 8. 10.

출처 : Daum 영화


(스포는 없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했습니다. 500만을 넘으며 엄청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듯 합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거의 반 쯤은 울면서 봤던 것 같습니다. 늘 관심이 많았던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또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기에 정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영화에서 송강호가 주는 그런 잔잔한 마음을 울리는 느낌은 이 영화에서도 빛을 발한 듯 합니다. 그리고 믿고 보는 배우 '유해진' 덕분에도 눈물을 한참 흘렸던 것 같네요. 전두환은 이 영화를 보고 자기가 주장하는 것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 고소하겠다니 어쩌느니 하고 있는데 이 영화가 천만을 꼭 넘어서 그 살인마의 입을 다물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에 나왔던 대부분의 장면들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18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박정희가 사망한 후, 사람들은 민주화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반하여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1980년, 5월 10일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과 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였고 거리시위를 계획했습니다. 이것을 알게된 전두환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를 만들어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습니다.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시위대와 대화는 커녕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도 거리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계엄령 확대'로 분노한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전두환은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구금하고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습니다. 이 때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습니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도 폭행을 당했습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시민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출처 : 5.18 기념재단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습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곳곳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도 19일에 사망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20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고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대의 차량 시위대가 나타났습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은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광주 MBC 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21일 오전 2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습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인한 불꽃과 연기가 피어 올랐습니다. 오전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했습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습니다. 계엄군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사격을 가했습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 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습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습니다. 결국 5시30분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7일 동안 ,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치열하게 부딪혔던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이후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횝고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습니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습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습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습니다.


출처 : 5.18 기념재단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용출처 : 5.18 기념재단

 

출처 : Daum 영화

기억나시나요? '위르겐 힌츠페터'를 연기한 토마스 크레취만은 영화 'The Pianist' 에서 독일군 장교로 나왔던 배우입니다.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위르겐 힌츠페터는 1937년 7월 6일 생으로 독일의 기자이자 언론인입니다. 독일 제1공영방송 기자로서 유일하게 동아시아 지부가 있던 홍콩으로 발령을 받았고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1969년 봄에 사이공에서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후 독일 제1공영방송 도쿄 지국으로 옮겨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7년간 특파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독일 제1공영방송의 일본 특파원으로 지내는 동안 그는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박정희 정권하의 여러 공안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광주 민주화운동 직전 가택연금 중인 김영삼과의 인터뷰 등을 녹음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5월 19일에 일본에서 광주 잠입을 준비한 뒤 20일 오전에 광주로 진입하게 됩니다. 23일까지 잠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취재하여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힌츠페터가 보낸 필름은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여러 외국에 즉시 보도되었습니다. 오늘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영상자료는 대부분 힌츠페터가 수집한 것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1986년 11월에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위 취재 도중 사복경찰에게 구타당하여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2004년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그는 사후 국립 5.18 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 광주민주화운동 유족회 및 광주광역시 등 관련 단체들이 그의 명예시민증 부여와 안장을 추진했습니다.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힌츠페터는 이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2003년 11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현장을 지켰던 치열한 기자정신이 국민의 양심을 깨워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공로로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습니다.  2016년 1월 25일 79세로 독일에서 삶을 마감하였으며 생전 힌츠페터가 바란대로 손톱과 머리카락 등 신체 일부가 대한민국의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출처 : KBS 푸른 눈의 목격자


출처 : KBS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 트라우트 브람슈테트는 방한하여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했습니다.

"내용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극장에서 그 내용을 본 것에 흥분했다. 잠을 일루 수 없을 정도로 벅찬 느낌을 받았다. 남편과 함께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특히 영화에서 시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인상적이었어요. 영화의 장면은 리얼했어요. 관련 다큐멘터리가 전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실제적이었어요. 그리고 배우들의 감정 표현이 되게 섬세했죠.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해요.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에 대해) 캐스팅을 굉장히 잘하신 것 같다. 외모도 흡사했고 표정과 동작도 실제 힌츠페터와 같았다. 동작이 정적이면서도 의지가 강한 모습을 연기한 토마스 크레취만은 힌츠페터의 모습 그대로였다. (힌츠페터의 인터뷰 영상에 대해) 그 인터뷰 영상을 찍었을 때 바로 옆에 있었다. 남편에게 5.18 광주민주화 운동은 과거가 아니었다. 힌츠페터의 인생에서 대한민국의 광주는 빼놓을 수 없었다. 힌츠페터 가슴에는 항상 김사복이라는 존재가 남아있었어요. 남편에게 '김사복씨를 다시 만나고 싶냐' 고 물었을 때 남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했어요. '김사복 씨가 살아있었다면 만나러 기꺼이 한국에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죠."


광주에 잠입한 위르겐 힌츠페터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사진


[5.18 생존자들의 증언]

총에 눈을 맞아 양쪽 눈알이 없어진 강해중씨 "내 생각에 아들들은 멀리 가서 괜찮겠고 우리 딸이 차 밑에 바로 있으니까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작은 딸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일어나니까 총을 쏴버렸다."


검안에 참여했던 전호종 교수 "M16으로 두부에 총을 맞았다. 배가 불러 있었다. 임신부였다.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기억에 남아있다"


임신 7개월이던 최미애씨의 어머니 "초상치를 때도 대문 잠가놓고 치렀다. 누가 들어올까봐. 애를 총으로 쏴서 끌고 가니까 그걸 보고 있었던거다. 다리를 잡고 머리를 땅바닥에 다 끌어서 피가 흐르니까 그걸 쳐다봤다고 하더라" 이걸 본 후 최미애씬는 현장에서 죽었다.


고등학생이던 김영찬 씨 "조금 있으니까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총소리가 났다. 도망가려고 하는데 친구들은 저쪽 건너편에 숨어 있었다. 그쪽으로 가는데 다리에 힘이 쫙 풀리더라." (총알 3발을 맞고 7번의 대수술을 함)


5.18 구속부상자회 곽희성 씨 "지금도 그렇다. 37년이 아니라 영원히 그럴거다. 가만히 생각하면 어쩔 때는 멍멍해지고 망월동에 가면 한동안은 미안해서 묘소 같은데를 못 간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할아버지들이 나와서 '젊은 애들은 들어가라', '난 살만큼 살았으니까 내가 앞장서겠다' 그 말을 들을 때. 그렇기 때문에 매일 나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그 시위대에 참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사진


이 일을 어떻게 다 잊을 수 있을까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이 일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몫일 것입니다. 정권의 포악하고 잔인함에 무자비하게 희생되었던 우리 국민들, 하지만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욕먹고 했던 오랜 시간끝에 천천히 겨우겨우 위로를 받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박근혜와 이명박은 5.18 추모곡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요, 살인마 전두환은 치매가 들었는지 헛소리만 해대며 개소리같은 회고록을 출간하질 않나, 그들은 왜 멀쩡히 살아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직도 너무 불공평한 이 나라가 너무 분노스럽습니다. 


출처 : KBS 푸른 눈의 목격자


당시 광주 시민들을 보면 정말 그렇게 싸워줘서 너무 고맙고, 그들의 용기와 정신이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보도해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에게도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가 전해주지 않았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실이 왜곡되고 있었을지... 꼭 '택시운전사'가 천만을 넘기를 바랍니다. 너무 억울하게 죽은 광주 시민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꼭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