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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8.15 광복절, 잊지 말아야 할 일제강점기의 시간들

by 빨강머리 앤 2017. 8. 13.

출처 : Daum 백과


8월 15일은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하나인 광복절입니다. 광복절(光復節)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35년의 길고 길었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우리 국민들이 나라를 되찾고 자유를 되찾은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이 날은 꼭 태극기를 달아 휴일의 의미를 넘어 우리나라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광복절 태극기 다는 법> - 깃봉과 깃면의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합니다. (광복절엔 왼쪽 방법으로)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통치를 당한 35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서구열강의 식민지정책과는 다른 형태의 식민지였습니다. 일본은 프랑스형을 모방하여 직접지배의 원칙을 채택하였지만 프랑스형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동화정책'이라는 이름 밑에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점하여 사회, 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함께 한국민족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한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본제국 내의 공식, 비공식적으로 차별받는 종속 천민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악랄한 정책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각종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가장 악랄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

일제강점기 일본이 행했던 수많은 만행들은 많이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친일파 청산 문제부터 위안부 문제, 조선인 학살 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출처 : 머니투데이


1. 에무지섬에서 2500여 명을 집단학살

2. 미시마(쿠릴) 열도에서 5000여 명을 집단학살

3.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때 1700여 명을 집단학살

4. 일제 패망 후 부산 어뢰를 만드는 군수공장 지하에서 1000여 명을 집단학살

5. 서태평양 팔라우제도 강제노역(징용) 조선인 4500여 명 중 2000여 명을 집단학살

6. 남태평양 마셜군도 강제노역(징용)에 동원된 조선인 400여 명 및 원주민 200여 명을 집단학살

7. 4,5세 어린아이부터 여성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조선인을 일본인이 무참하게 살해한 이른바 가미시스카 학살과 미즈호 학살의 사할린 집단학살 사건

8.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 중국 하이난(해남도) 섬 강제노역(징용)에 끌려간 2000여 명 중 1000명은 강제노역 도중에 사망하고 1000명은 칼과 곡괭이 등으로 무참하게 집단학살한 천인갱 사건

9. 1939년부터 일제가 식민지인을 강제로 동원시키기 위해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여 수많은 한국인을 동원하였고 1944년에는 강제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징용제'를 실시했습니다. 끌려간 한국인들은 국내외 군수 공장, 철도 건설 현장, 탄광 등의 각종 공사장에 강제로 끌려가 군대식으로 편성하여 노예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10. 1938년에는 학생 지원병 제도, 1942년에는 징병 제도를 차례로 실시하여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사용했습니다.

11. '근로 정신대'를 만들어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거나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12. '제암리 학살사건' 1919년 3.1 운동 당시 일본군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 일본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제암리에 도착하여 마을 주민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넣게 한 뒤 출입문과 창문등을 철폐하고 집중사격을 해 전원 학살을 하였고 이 만행을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고 못 나온 사람들은 타죽었으며 나온 사람들은 총에 맞고 숨졌습니다. 

13. 3~4개월간 이루어진 간도 대학살. 독립군 토벌이라고 했지만 사망자들은 간도에 이주해 살던 선량한 백성, 양민 4000여 명이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3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 민간인을 작두와 일본도로 참수하고 생매장시키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사지를 잘라 죽이고 얼굴과 피부 가죽을 벗기고 여성을 겁탈하였습니다. 

14.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도쿄를 중심으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고 대화재가 일어나 14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그 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며 방화를 하였으며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헛소문이 돌아 경찰과 자경단은 약 6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징병 : 일제의 침략 전쟁에 군인으로 강제 동원되는 것

*징용 : 일제의 침략 전쟁에 노동으로 강제 동원되는 것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

일제의 식민통치 변화는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10년대는 '헌병경찰제로 무단통치'를 했으며 1920년대는 '민족을 분열시켜 문화통치'를 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민족 말살 통치'를 행했습니다.


출처 : Daum 백과 (광화문 뒤 조선총독부. 현재는 철거됨)


<1910~1919 헌병 경찰제로 무단통치>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일제는 헌병 경찰제로 무단 통치를 실시했습니다. 대한 제국의 주권을 빼앗을 식민 통치의 최고 기구인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일제 식민 통치의 최고 기관이며 조선 총독부의 중요한 자리에 대부분 일본인을 임명했으며 일부 친일파들을 보좌역이나 앞잡이로 내세워 식민 지배에 이용했습니다. 일제는 경복궁의 여러 건물을 훼손하고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었습니다.


출처 : Daum 백과 (헌병경찰)


일제는 한국인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1910년대에 헌병 경찰제를 만들어 헌병에게 민간인에 대한 경찰 업무까지 하게 하였으며 그들은 형량이나 벌금이 가벼운 사건의 경우 재판 없이 한국인을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헌병 경찰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고 한국인의 일상생활까지도 철저하게 감시하였습니다. 또한 헌병에게 범죄에 대한 즉결 처분권과 태형권을 부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위화감을 주기 위하여 일반 관리와 교사에게도 칼을 차고 제복을 입고 근무하게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은 물론 박탈되었으며 한국인의 고등 교육 기회를 박탈하고 일본어 중심의 교육을 시행했습니다. 

일제는 나라를 빼앗은 후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습니다. 이것의 목적은 식민 통치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고 식민 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며 일본인의 정착에 필요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은 토지 주인이 자신의 토지를 정해진 기간에 직접 신고해야 했습니다. 일제는 신고하지 않은 토지나 나라의 토지, 주인이 없는 불명확한 토지를 조선 총독부 소유로 편입시킨 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일본인에게 싼 값으로 넘겨주어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생활은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로 많은 농민이 비싼 토지 사용료를 내고 농사를 지어야만 했고 토지의 사용료가 오르고 세금이 늘어나 농민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의 회사 설립과 경영을 억제하고 민족 자본의 성장을 방해하고 일본 내의 자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령'을 공포하며 조선 총독이 내리는 명령 및 허가 조항에 따라야 하며 위반할 때는 사업의 금지, 회사의 해산을 명령할 수 있다고 규정지었습니다. 결국 조선인의 경제 활동은 억압당했고 일본인의 회사 설립이 훨씬 유리했으며 조선의 자본 유출로 이어졌고 조선인은 소규모 제조업, 상업 등 식민지 산업 정책을 보조하거나 일본 기업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되었으며 전기, 철도, 금융 등은 일본인이 독점하였습니다.


출처 : Daum 백과 (3.1 운동)


<1920~1929 문화통치>

3.1 운동으로 인해 식민 통치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시켰습니다. 문화통치의 목적은 친일 세력을 길러 우리 민족을 분열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문관 출신 총독 임명을 허용했지만 해방까지 문관 출신이 총독에 임명된 적은 없었으며,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 경찰제를 도입했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 예산이 3배 이상 늘어나고 경찰력이 더 강화되었으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으나 검열을 통해 이를 통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거나 일제를 비판하는 기사는 삭제하고 발매 금지 및 압수했습니다. 또한 조선 교육령을 반포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학교수를 늘렸지만 공납금이 비싸 한국인의 취학률이 매우 낮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공업이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쌀값이 폭등하여 심각한 식량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쌀 생산이 감소하여 1918년 전국적으로 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일제는 식민지인 한국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조선 총독부는 쌀을 증산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품종을 개량하고 저수지 시설을 확충하였지만 일제는 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의 식량사정은 매우 악화되어 쌀이 부족하게 되었고 농민들은 소작료나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더욱 가난해진 많은 농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국내에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은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 등 해외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Daum 백과 (창씨 개명 당시 법원 공고 문서)


<1930년대 이후 민족말살정책>

1931년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극 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1941년 미국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등 침략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을 위해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일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일본인(내지인)과 한국인(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 동조론'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이라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통해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외우도록 했으며 우리말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만 쓰도록 하였고 우리 역사 교육도 금지했습니다. 한글로 간행되던 신문도 폐간시키고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연구도 금지시켰습니다. 또한 우리의 이름까지도 일본식 성과 이름으로 고치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으며 이것을 거부할 경우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고 식량 배급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고 전국 곳곳에 일본 신사를 세워 한국인에게 절을 하도록 하였으며 아침마다 일본 국왕의 거처가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며 경의를 표하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한국말을 사용하면 교무실에 순사가 와서 다그치는 등 학교의 분위기가 매우 살벌하였습니다.